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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와 계이

CRAFT & ARTISAN #03

황이와 계이

옛 제례에 관해 알아보는 건 생각지 못한 쾌감을 선사하는데, 이 요상하고 신비로운 제기를 발견한 일 역시 그렇다. 자칫 고리타분해 보일 수도 있는 제례 의식은 과정과 기물에 담겨 있는 의미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은근한 자긍심이 생겨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아름다움과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좋다. 우리의 옛 제기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황이와 계이라는 아름다운 잔을 마주하게 됐다. 기물에 문양을 새기고 절기에 따라 예를 갖춰 쓰는 일, 그 고매한 정신에 그만 매료돼버리고 말았다.

4종의 이기(彝器)
나라의 제례에 쓰는 그릇을 이기(彝器)라고 부른다. 황이(黃彝)와 계이(鷄彝)는 고대부터 국가 제례에 중요하게 사용한 6종 그릇의 일종이다. 이기는 그릇 표면에 황금 눈 장식을 한 황이, 닭 그림을 새긴 계이, 벼 이삭 그림을 새긴 가이(斝彝), 봉황 그림을 새긴 조이(鳥彝), 호랑이 그림을 새겨 넣은 호이(虎彝), 원숭이 그림을 새긴 유이(蜼彝)로 구성된다. 6종의 이는 그릇 표면에 새긴 문양에 따라 이름 지은 것으로, 우리 왕실 제례에는 계이.조이.가이.황이만을 사용했기에 4종의 이기만 전한다. 이기는 신을 모시는 강신(降神) 절차에 사용하는 울창주*와 명수**를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했고, 제례별로 각 이기의 수량과 조합을 달리했다. 『세종실록오례의』, 『국조오례서례』, 『춘관통고』 등 국가의 전례를 기록한 다수의 책에 이기의 그림과 해설이 등장한다.

*울창주 :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에 삶은 울금을 섞어 만든 향기 나는 술.
**명수 : 달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 명수는 만드는 방법이 너무 힘들어서 후대에는 정화수(첫 새벽에 길은 우물물)로 대체했다.

현대에도 유효한 잔 하나의 의미
옛 제례와 제기를 돌아보며 우리가 얻고자 한 것은 하나의 기물에도 의미를 두고 예를 갖추는 마음가짐이다. 물론 예를 지나치게 지키거나 따지고 드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를 전부 내던지고 마음대로 사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는 동시에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형식이 아니다. 마음을 울리는 멋스러운 예(禮)는 그저 자연스럽게 배워서 따르는 것이 삶을 즐겁게 하는 재미난 방법. 우리가 나름대로 예를 갖출 잔 하나 정도 두고 산다면 전통을 지키는 아주 멋진 일일 것이다.